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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실제얼굴 빵 영화 뮤지컬 나이 남편 루이 16세 자녀

burupdant 2023. 11. 2. 13:52

- 그녀의 나이 프로필

출생 나이 생일
1755년 11월 2일

고향 출생지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쇤브룬 궁전
사망
1793년 10월 16일 (향년 37세)
프랑스 공화국 파리 혁명 광장

장례식
1815년 1월 21일
생 드니 대성당

신체
154cm
배우자 남편
루이 16세 (1770년 결혼 / 1793년 사망)

자녀 가족관계
장녀 마리 테레즈, 장남 루이 조제프, 차남 루이 17세, 차녀 소피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프랑스 왕비에서 단두대로… 혁명이 불러낸 희생양인가
- 2023. 10. 27.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프랑스혁명 당시 성난 민심에 불을 붙인 망언을 한 것으로 비난받는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가 루이 16세의 아내이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왕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더하자면 앙투아네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악녀로 만들었고, 온갖 죄악을 뒤집어씌워 유죄로 처벌한다.

진실에 깊숙이 다가가면 그는 평범한 왕비에 가깝다. 국민을 사랑으로 돌보진 않았으되 미워하지도 않았다. 한때 유럽의 패자였던 합스부르크가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로 태어나 놀기 좋아했던 철없는 아이였던 앙투아네트는 오직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의 왕비가 됐고, 숨 막히는 궁정에서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진 재력을 즐긴 여인이었답니다.

정치에 문외한이었던 이 여인은 프랑스 재정이 위기에 처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걸 알게 된 뒤 사치를 멈췄지만, 이미 들끓기 시작한 비난의 여론까지 잠재울 순 없었다. 왕비는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 천문학적 금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매한 후 빼돌린 희대의 사기극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지만, 국민은 진실과 상관없이 사기꾼의 얘기를 믿었고 오히려 앙투아네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생계에 허덕이던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붓는다.

사실 프랑스 재정이 파탄 난 건 앙투아네트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루이 14세와 15세가 진 빚이 루이 16세 때 돌아온 결과였다. 국민들은 한때 사랑하고 선망했던 이 여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며 비난을 쏟아부었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그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1920∼1930년대 유럽 최고의 작가로 꼽힌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 소설의 양식을 빌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을 조명한다. 굳이 거짓을 보탤 필요 없이, 소설 같은 삶을 산 이 여인의 이야기는 사실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의연하게 죽은 마리 앙투아네트
- 2023. 8. 31

남자가 몰락하는 길이 있듯이 여인에게도 몰락하는 길이 있다는데, 사치와 교만과 천박함이다. 천박함은 무시를 겪지만 책 좀 읽으면 극복되고, 교만은 따돌림을 받지만 종교나 수양을 쌓으면 탈색되지만, 사치는 참으로 벗기 어려운 비난이랍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과도하게 사치했다고 비난받는 여성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일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비의 16남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 프랑스 왕비가 됐으니 검소했더라도 사치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당시 농노들은 밭두렁에서 짐승처럼 뒹굴며 살 때 프랑스 귀족들은 산해진미를 즐기다가 중간에 토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다시 먹었으니,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앙투아네트 왕비가 34만8000프랑짜리 다이아몬드 귀고리를 샀는데, 그 값은 그 시절 파리 중산층 5000가구의 1년 생활비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음해한 귀족의 말을 스위스 출신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혁명을 합리화하려고 그대로 『고백록』에 기록한 것이랍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는 말도 혁명파가 지어낸 낭설이다. 앙투아네트 왕비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궁궐 안에 텃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다친 농부를 치료해 주고, 빵공장을 세워줬다. 그런데도 프랑스혁명 와중에 국고 낭비,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왕을 타락시킨 혐의, 백성 기만, 프랑스 멸망 시도, 전쟁 유발 등으로 기소됐다. 혁명에는 늘 누명이 필요했다. 프랑스인은 그를 ‘오스트리아 계집’이라 부르며 단두대에 세웠지만, 그는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다.

앙투아네트 왕비는 단두대 계단을 올라가다가 형리의 발등을 밟자 정중하게 사과했다. 사제가 고해성사를 말하자 왕비는 “지은 죄가 없으니 고백할 것이 없다”고 대답하고 파리광장에서 의연히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