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해체로 이어진 개혁을 추진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30일 숨졌다. 향년 91.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 등은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이 오랫동안 노환을 앓다가 이날 저녁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에서 숨졌다고 전했다. 러시아 언론들은 그가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 입원해 요양해 왔다고 전했다. 장례식을 치른 뒤 러시아의 중요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모스크바 노보드비치 공동묘지에 있는 아내 라이사의 옆에 묻히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중심 무대에 올라선 것은 ‘제국 소련’이 내리막으로 치닫던 1985년이었다. 소련 제국의 최고 자리인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라섰을 때 그는 정치국 내 최연소 국원이었다. 54살의 젊은 서기장은 소련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 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허용하고, 경제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앞선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사망 3년 전부터 사실상 집무를 보지 못했고, 뒤를 이은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네코도 고령과 병환으로 서기장에 오른 지 1~2년만에 숨졌다. 늙고 병든 최고 지도자들의 모습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당시 소련 체제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 서기장은 소련의 개혁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의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고, 정치 과정을 효율화하기 원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사회주의권과 소련의 해체로까지 내달았다. 1989년 동독 붕괴를 시작으로 동구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1991년 12월 소련마저 해체됐다.
고르바초프는 이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과 소련 내 공화국들을 억압하지 않고, 냉전을 평화적으로 끝냈다. 동서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제국 소련이 붕괴하며, 국내에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소련이 해체된 뒤인 1996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0.5%를 얻는데 그쳤다. 현재 러시아에선 그를 ‘소련을 해체시킨 반역자’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2000년 5월 권좌에 오른 블리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005년엔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회고하며,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손대고 싶은 사건으로 이를 꼽았다.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2일 남부 러시아의 스타브로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는 집단농장에서 일했다. 그 역시10대 때 콤바인을 운전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 1955년 모스크바국립대학을 졸업한 뒤 공산당의 열성 당원이 됐다.
합리적이고 민주적 태도를 지닌 신세대 공산당원이었던 고르바초프는 당의 딱딱한 위계질서와 고령화된 지도부에 점점 염증을 느꼈다. 1961년 청년공산주의자연맹의 지역 서기장이 된 뒤, 공산당 전당대회에 대의원으로 파견돼 중앙 무대로 진출했다. 농업 행정을 맡아 혁신을 도입했다. 이런 업적으로 당내 지위가 급속히 올라갔다. 1978년엔 모스크바에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농업서기로 승진했고, 2년 뒤엔 정치국원으로 지명됐다. 브레즈네프가 1982년에 사망한 뒤엔 안드로포프 서기장 밑에서 해외를 방문했다. 1984년 런던에서 그를 마주한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나는 고르바쵸프를 좋아한다”며 “우리는 함께 일을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전 지도자들과 다른 고르바초프의 세련된 의상과 어투, 개방적인 자세는 서구의 이목을 끌었고, 부인 라이사 역시 소련 지도자의 부인 중엔 처음으로 대외활동에 나섰답니다
최고 권력을 쥔 고르바초프의 첫 임무는 경제의 활력 회복이었다. 이를 위해선 통제경제의 사령탑인 공산당을 개혁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인민위원 직선제 도입 등 당의 민주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억압적인 정치체제를 완화하자, 소련 내 각 민족들의 민족주의가 분출했다. 1986년 12월엔 카자흐스탄에서 첫 반소 시위가 벌어졌다.
다른 한편으론 소련 경제를 옥죄는 군비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군축협상에 나섰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등 일련의 군축협상을 진행했다. 또 재래식 무기 감축도 선언했다. 아프간에서 전쟁을 종식시키려 1989년 철군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개방 정책은 소련 경제의 회생이 아닌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 동독이 무너지며, 동구 사회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엔 지중해의 섬 말타에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1990년엔 1당 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해 당선됐다.
이런 흐름에 반발한 소련 군부의 보수 강경파들은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흑해 크림반도 별장에 연금했다. 보리스 옐친 당시 모스크바 당서기가 쿠데타 반대의 선봉에 서서 이를 저지하고 권력을 쟁취했다. 옐친은 소련 해체를 주도하며 고르바초프를 무력화했다. 결국 1991년 12월26일 소련이 해체되며,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연방이 출범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국제적인 명사로 활약했으나, 러시아 내에선 영향력을 잃었다. 1999년엔 평생의 반려자였던 아내 라이사가 백혈병으로 숨졌다.
고르바초프는 푸틴 대통령 체제엔 비판적이었지만 2014년 3월 크림반도 합병에는 찬성했다. 그는 당시 “크림이 당시 소련법, 공산당 규정에 따라서 우크라이나로 할양됐지만, 주민들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며 “이제 주민들 자신이 그런 실수를 교정하도록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전 자신이 추진한 개혁·개방, 냉전 종식, 핵무기 감축 등이 옳은 정책이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결과를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통제 경제를 시장 경제로 바꾸려는 의도도 없었다. 1985년 당 대의원 연설에서 “여러분 중 일부는 시장을 경제의 구원자로 보는데, 하지만 동지들은 구원자가 아니라 배를 봐야한다. 그 배는 사회주의이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 경제를 회복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해체와 냉전 종식으로 향하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역사는 이 질풍노도의 과정을 촉발시켰던 인물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푸틴, 고르바초프 장례식 불참..국장도 불투명 - 2022.09.02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별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1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크렘링궁은 푸틴 대통령이 업무 일정이 있어 오는 3일로 예정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대신 푸틴 대통령은 이날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시신이 임시 안치된 모스크바 중앙임상병원을 찾아 조문했다는 설명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불행히도 대통령은 3일 업무 일정이 있다”며 “푸틴 대통령은 오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눈을 감은 병원을 사전에 찾아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고 설명했답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국장(國葬)으로 치러질지를 묻는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
2007년 보리스 옐친 전 소련 대통령 서거 당시 푸틴 대통령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국가 애도일을 선포한 바 있다. 옐친 전 대통령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인 연방보안국(FSB) 국장에 푸틴 대통령을 발탁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유족측에서는 고인의 장례식을 3일 정오부터 모스크바의 ‘하우스 오브 유니언’에서 진행한다고 밝혔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로서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듬해 동서독 통일을 사실상 용인하고 서방과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자유 진영에서는 냉전 종식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러시아 내에서는 강대국이었던 소련 해체를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부정적인 여론도 높다. 푸틴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를 “20세기 가장 끔찍한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 프로필 이력 경력
출생 나이 생일 1931년 3월 2일 사망 2022년 8월 30일 (향년 91세)
재임기간 제6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85년 3월 11일 ~ 1991년 8월 24일 제11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88년 10월 1일 ~ 1989년 5월 25일 초대 소련 최고회의 주석 1989년 5월 25일 ~ 1990년 3월 15일 초대 대통령 1990년 3월 15일 ~ 1991년 12월 25일
부모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 어머니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배우자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1953–1999, 사별) 자녀 딸 이리나 미하일로브나 비르간스카야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무종교 (사실상 러시아 정교회)
신체 키 175cm
소련의 마지막 최고지도자로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제11대 최고회의 주석[6]이자 소련의 유일한 대통령.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재임하면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길고 길던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이자 고르비(Gorbi)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소련 정치 및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혁신(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시도했다. 소련을 살리려고 진정한 의미에서 노력한 마지막 인물로써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기득권층의 반발(8월 쿠데타)과 보리스 옐친 등 신진 세력의 대두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소련을 붕괴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구권을 포함한 자유 진영에서는 냉전을 종식시킨 그를 높이 평가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초강대국 소련을 멸망시킨 매국노'라는 부정적 평가가 많다.
대한민국에서는 레닌,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와 더불어 인지도가 높은 소련 정치인들 중 하나이다
- 생애
- 어린 시절 및 출세 가도
남러시아 캅카스 인근의 스타브로폴 프리볼노예에서 농부였던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와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사이에서 2남 중 첫째로 태어났다. 이곳은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여러 인종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며, 그의 외가는 우크라이나계 카자크와 러시아인의 혼혈 집안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역사상 최초로 러시아 혁명 이후에 태어난 서기장이다. 바꿔 말하면 처음부터 소련인이었다는 것이다.[9]
공산국가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출신 성분인 농민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는 농부였고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콤바인을 모는 등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해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도 열심히 했고, 공부도 잘한데다가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최고 명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고, 1955년 법학 학위를 받는다. 재학 시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고향인 스타브로폴에서 관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고, 중앙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안드로포프 같은 사람들 눈에 띄어 초고속으로 출세했다. 사실 고르바초프는 당대의 러시아인 공산당 당원치곤 술을 멀리하고 아첨을 할 줄 몰랐다.[10][11] 이 점은 당대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흔했던 술고래 관료들을 몹시 한심하게 생각한 안드로포프가 주목하면서 오히려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고, 하루에 10시간 정도의 일은 전혀 불평 없이 해내던 근면한 근무 자세도 플러스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농업문제에 대해서 브레즈네프나 코시긴에게 직언하는 등 강단이 있는 간부로 여겨졌고, 이 때문에 소련 공산당 내부의 지지를 얻어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0년대에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최연소 정치국원이었으며, 서기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도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여 바로 정치국 위원 자리를 주려고 했고 안드로포프도 그를 아꼈다. 반면 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안드로포프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후임자가 되길 바랬으나 그가 너무 일찍 사망하면서 권력은 체르넨코가 승계한다. 고르바초프를 좋아하지 않았던 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는 농업서기인데 그가 서기국을 책임지면 서기국이 농업국이 될 수 있다면서 그를 해임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에게 우호적이었고, 그를 서기장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던 우스티노프가 고르바초프는 그런 오류를 범한 적이 없다고 지지하였다. 결국 체르넨코도 얼마 못 가 사망하자 정치적 안정을 위해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던 정치국 안에서 가장 젊은 그가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에 그는 기대를 한몸에 모았답니다.
= 집권
앞서 보듯 그가 서기장이 되기 전에 소련은 세 명의 서기장이 1년마다 한 명씩 노환으로 사망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때문에 당시 서기장 후보 중 가장 젊었던 그가 고작 54세의 나이로 서기장이 된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시작된 소련의 개혁/개방 운동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체제에 들어서 반동, 정체되다가 그의 시대에 다시 활성화되고 정점을 맞은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 개혁정책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농업식량 담당 서기로 있다가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취임하면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면서 당시 침체에 빠져 있던 소련에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12] 그야말로 임기 매년을 뉴스와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트렸던 인물이다. 타임지 선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대외적으로는 사상 최초로 서방 세계와의 군비 축소와 평화 무드를 만드는 업적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무엇보다도 냉전을 종식시켰다.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했다. 1989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나 1960년대 수정주의 논쟁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가까스로 화해 했다.
또 1989년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동·중부유럽 공산주의권 국가의 변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10월 27일), 이는 곧바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다수 중부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몰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1945년 이후부터 이어져 오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40여년 이상 이어오던 공포, 대립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물꼬를 튼 인물. 이러한 업적으로 서방 세계로부터 이 사람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원본 노선은 공산당 일당 독재였던 소련과 중앙/동유럽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였다. 소련 공산당 역시 소련 사회민주당 비슷한 형식으로 바꾸려고 했고 순수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이전,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는 전과 비슷하게 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브레즈네프 이래로 만연했던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그는 전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북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고 했다.
- 소련 해체
니콜라이 리즈코프 내각의 대 러시아 타협 거부 등의 정치적 이유와 상술했던 고르바초프의 실패로 1991년에 소련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고르바초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당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시민의 저항을 이끌어내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해체 및 민주 국가로의 소련 개헌이라는 마지막 연방 유지 방안을 제시하나, 결국 소련은 옐친에 의해 1991년 12월 해체된다.
이후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도 나갔으나 보리스 옐친이 당선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지지율은 0.5%를 기록했다. 2011년 선거를 겨냥하여 2008년 9월에 레베데프와 함께 중도 성향의 러시아 민주당 창당을 발표하면서 12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는데, 그가 맡은 건 당 명예고문 역이라 실질적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가 일생 동안 겪은 위상 변화를 그의 이름이 점점 짧아지는 것으로 그려낸 만평도 있다.
세계적 공로가 하나 더 있다면 집권 중이던 1986년에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24]와 북극해안의 핵 폐기물 문제를 세계에 공개한 점이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이 일을 통해 개혁 추진 속도를 더 낼 수가 있었다.[25] 체르노빌 사고 처리 과정에서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체제의 한계를 절감해서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그의 인기에 타격을 준 일이 바로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한 정책이다. 러시아의 평균수명이 1960년대 중반 이래로 침체되었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의 증가였는데 보드카 판매를 규제하면서 일단 평균수명을 늘릴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의 정치적 인기는 줄어버렸고, 가뜩이나 석유값 하락으로 소련의 세수가 후달리던 형편이었는데 보드카 판매까지 규제시켜 놓으니 세금도 줄어들어 버리는 동시에 암시장까지 활성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술은 규제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러시아인들 스스로 정신 차려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니 결국 고르바초프가 밀려난 뒤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고 사회복지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의 남성 수명은 57세까지 떨어졌다. 한편 이 정책에 극구 반대했던 소련 해체의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인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지지율은 오르기 시작했다.
- 퇴임 후
2007년 루이 비통 광고에 출연한 고르바초프 (76세)
퇴임 후 보리스 옐친에게 푸대접을 받았다. 거기에 당시 러시아 경제와 사회복지제도가 붕괴되었고 연금도 제때 지급되지 못할 정도로 고르바초프의 대우는 형편 없었고, 고르바초프는 외국 대학이나 기관의 강연료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27], 루이 비통, 피자헛 등 외국 기업의 CF에 출연하여 생활비를 벌 정도였다. 어느 날, 자신의 매달 연금이 얼마일지 궁금해져 은행서 1달치 연금을 $로 환전했더니 불과 몇십 센트에 불과했다고 기자들 앞에서 한탄하기도 했다.
1993년 4월 1일에 드미트리 무라토프 등 진보성향 언론인들에게 자금 후원을 해 노바야 가제타를 창간했으며, 지금도 10%의 지분을 갖고 있답니다
1996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0.5%의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고, 소련 부활을 내세운 겐나디 주가노프가 1차 투표에서 옐친과 비슷한 득표율 (옐친 35%, 주가노프 32%)을 받은 것을 보면, 고르바초프의 당대 평판을 알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반 푸틴 진영을 지지하며 푸틴과 대립각을 여러 번 세웠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독재자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당연히 러시아의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와의 사이도 좋지 않다. 통합 러시아 소속 국가두마 의원들이 소련 붕괴의 책임을 물어 고르바초프를 고발한 적도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벌어진 2014년부터는 갑자기 푸틴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는 러시아인이라면 당연한 것인데, 크림 반도는 소련 시절 행정편의로 우크라이나에 간 것인데 이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상, 다시 러시아에 와야 한다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공통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추진한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실 푸대접을 받았던 옐친 시대와는 달리 푸틴 집권 이후에는 대우가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2008년 10월 국제환경포럼, 2009년 5월 세계평화의 종 공원 준공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두 행사 모두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열렸다. 2009년 5월에는 손녀 아나스타샤 비르간스카야와 함께 참석했다.
2011년 3월에는 러시아 최고 등급 훈장인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을 수여받았다.[30]
2011년 8월에는 푸틴 정권이 소련 공산당의 다운그레이드판이며 구태적이라고 비판했지만, 푸틴을 옐친 시대의 혼돈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12월에는 148%에 대해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푸틴은 대통령 2번, 총리 1번 했으면 충분하다며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답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러시아의 정치 불안이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2016년 5월 23일에 크림 합병은 올바른 결정이라는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고 입국을 금지한 우크라이나를 비난했답니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했던 만큼, 현재는 주로 사민주의 계열 군소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답니다
2016년 4월에 방한해 제주포럼에 참석했다.
2016년 6월에는 언론에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자신을 미국 스파이로 평가하는데 억울하다고 하였다가 러시아 국민들에게 냉소만 받는 안습의 극치를 이루었다. 기사
2016년 10월 10일. AFP와의 인터뷰에서 심해져 가는 러시아와 미국간의 갈등을 "세계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다"며 "갈등을 멈추고 대화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7년 1월 27일 핵전쟁 위험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미-러가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7년 6월, 나토의 확대를 두고 푸틴과 설전을 벌였다. 푸틴은 고르바초프가 순진하게 나토 확장 금지를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토가 확장되어 러시아의 안보가 위험해졌다고 주장했고, 고르바초프는 옐친-푸틴 시절에 확장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2017년 10월, 자신의 서기장, 대통령 시절 사건과 기억을 담아 '나는 여전히 낙관론자'라는 제목의 새 책을 발표했습니다
책 출간행사에서 한 시민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러온 긍정적 사실·부정적 사실 모두 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게 자극을 주었고 그것은 전 세계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는 후문입니다.
2019년에도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답니다.
2020년에는 <태양 아래>, <푸틴의 증인들>로 유명한 반푸틴 영화감독인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촬영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고, 9월에는 대통령 3번, 총리 1번이면 충분하다며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제 물러나야 하고, 헌법에 기초하여 민주적인 선거로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하는 등 또다시 푸틴의 심기를 거스르기도 했다.# 하지만 흘러간 정치인인데다가, 고르바초프 본인의 영향력도 거의 없는지라 딱히 푸틴이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2021년에는 2016년에 이어 또 제주포럼에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참석했다.#
2021년 8월 17일, RI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탈레반의 승리로 끝나고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탈출하는 미군과 아프간인의 참상에 대해,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며, 패배를 좀 더 일찍 받아들여야 했다고 평했다. #[34]
다음 날인 8월 18일, 소련 보수파 쿠데타 30주년을 앞두고 도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정권의 독재적 성향이 심화되고 있다고 또다시 푸틴을 건드렸으며, 그럼에도 본인은 낙관주의자라면서 어려움, 오류, 좌절이 있더라도 러시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덧붙였다.#
2022년 1월 13일에 소련의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 탄압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군사 작전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 위기가 고조되자 고르바초프는 자신과 부시가 한 약속을 깬 NATO와 미국을 비난했다. #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 재단은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첨예한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호 존중과 이익에 입각한 협상과 대화가 유일한 방법"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고르바초프의 친구이자 러시아의 유명한 기자였던 알렉세이 베네디크토프는 최근까지 고르바초프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고르바초프는 베네디크토프한테 푸틴은 그가 일생을 바쳐 이룩하려 했던 것들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 평가 내용 - 서방에서
서방 세계에선 냉전의 종결・종식자, 평화와 민주주의의 사도 등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그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던 냉전을 미국과 화해를 하여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고, 동유럽 국가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으며,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환경 오염 문제에 대해 공개하여 인류에 큰 기여를 했다는 까닭에서랍니다
-. 구 소련 지역에서
러시아인들은 그를 강대한 조국 소련을 망하게 만들다 못해 미국에 헌납한 매국노라고 생각한다. 매국노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해도 개혁의 실패로 국가를 해체시킨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르바초프가 중국의 덩샤오핑이나 베트남의 쯔엉찐과는 달리 무리한 개혁개방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소련의 공산당 체제가 빠르게 망한 것도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도 별로 없다. 소련 국민들이 기나긴 줄로 상징되는 생필품 부족과 KGB의 감시 같은 것에 살긴 했지만 교육, 의료, 주택 등 기본적인 삶의 질은 보장되었고,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 최강의 군대,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 스포츠, 예술을 보유한 초강대국이었기에 러시아인들은 국가에 대해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 해체 이후 모든 게 산산조각나면서 어느 순간 러시아는 3류 국가가 되고,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들 정도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해버린 것이었다. 군대의 경우, 서방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소련군이 건재할 당시에는 병력이 500만 명[36]으로 규모만 놓고 보면 미군을 압도할 정도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의 러시아군은 병력 수가 120만 명으로 쪼그라들고 군용 물자도 줄어들었는데 그나마도 노후화되고 고장난 게 태반이랍니다
러시아의 방송 채널 로시야 1에서 방영한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 토론. 극우파 정치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러시아 자유민주당 당수와 연극 감독인 이오시프 라이헬가우즈의 토론이다.
한편 일부는 그가 미국에서 보낸 첩자거나 희대의 무능아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처럼 하지 않고, 무제한 개방을 펼쳤기 때문에 소련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2000년대 중국 공산당이 개최한 회의에 초청되어 자신이 너무 정치개혁에 성급했다고 인정하고, 중국 공산당의 길이 더 바람직한 길같다며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답니다
소련 말기는 경제 사정이 상당히 나쁘기는 했지만,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문화대혁명 직후[39] 중국보다야 훨 사정이 나았으며, 고르바초프나 소련 공산당이 잘 수습했다면, 민주제는 몰라도 현재의 중국식 체제를 이뤄 국민의 경제생활을 훨씬 윤택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개혁은 둘다 박살냈다.
덩샤오핑의 경우는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같은 급진책을 남발하다가 국가를 재앙에 빠뜨리는 것을 자신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인지, 어떤 정책이라도 경험적으로 검증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어 중국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런 느린 접근도 덩샤오핑이 워낙 혁명가나 행정가로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 같은 권위는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해도 결국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속에 흐루쇼프처럼 실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중국이나 소련이나 계획경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이 불가능했고, 양쪽 모두 개혁과정에서 반발은 엄청났으나, 중국은 덩샤오핑이 가졌던 엄청난 권위와 교묘한 정치술[40]로 반발을 억누르면서 조심스럽게 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제개혁을 추진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소련은 조급하게 정치개혁까지 손댔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웠다고 할 수 있답니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10여년간 헤메다가 2000년대 중반에야 엄청나게 오른 유가 덕분에 어느정도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는 자원 가격에 민감한 법이라 2014년 유가가 급락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이 터지자 러시아는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고 있다. 결국 이것도 알고보면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와 옐친의 무능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물론 아직도 그 경제구조의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푸틴의 잘못도 크다. 2022년 기준, 30년이 지났는데도 러시아는 수호이, 미그, 에네르기아, 흐루니체프 등 구 소련 시절의 기술력으로만 연명하는 군대나 항공우주 관련 기업들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내세울만한 대기업도 없이 아직도 한국과 GDP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실정이랍니다
2017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들 중에서 고르바초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의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이는 우크라이나(22%)나 조지아(18%), 아르메니아(13%)와 같은 다른 구소련 국가들도 마찬가지.[42] 조사가 이루어진 국가들 중 고르바초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50%를 넘긴 구소련 국가는 2차대전 때 소련에 강제로 병합당한 에스토니아(56%)가 유일했다.# 다만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입 국가들을 포함할 경우 헝가리(54%), 폴란드(51%), 체코(53%)가 있다. 그러나 소련 해체의 여파가 너무 강했는지 그 반러국가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서도 긍정 평가가 각각 48%, 39%라는 처참한 수치를 기록했다.
단, 고르바초프가 옐친보다는 나은 평가를 받는다. 사실 정확히는 둘 다 최악인데, 굳이 고르라면 고르바초프가 아주 조금 더 낫다는 것.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로, 옐친의 소위 '서방으로부터 조언받은 충격요법'을 실시한 후 벌어진 러시아의 참상에 비하면 고르바초프 시기는 그보다는 나은데다가, 고르바초프가 재임했을 땐 이미 브레즈네프 시절에 개입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라는 요소가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여기에 '체르노빌 참사'라는 악재까지 겹쳐진 게 일종의 면피 요소는 되기 때문이랍니다.
특히나 미국도 소련처럼 아프간에서 죽 쑤다 철수하고 있으니 더더욱 면피할 구석이 조금은 있는 셈. 결국 2021년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도 전인 8월 15일에 항복했고, 미국의 철군 및 민간인 이송 과정이 참으로 졸렬하고 한심하게 진행되고 있어, 철군 과정이나 소련 철군 이후에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유지 및 지원이라도 잘한 고르바초프가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물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무자헤딘에게 정권이 전복당하긴 했지만 옐친이 소련을 해체시키고 아프간에 대한 지원을 끊고 러시아까지 철저하게 말아먹은 탓이지, 이 셋 중 하나라도 안 됐으면 여전히 지원을 하여 나지불라와 휘하 아프간 정부군 장성 및 각료들은 무자헤딘들과 내전 및 준내전 상태를 유지해가면서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유지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인들이 자부심을 느꼈던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는 수호하려 노력했고 8월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음에도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좀 더 강화하는 형태, 즉 주권국가연맹 체제로 바꿔서라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적어도 후임자의 후임자보다는 평가가 훨씬 좋지만 그래도 다소 복잡한 편이다. 고르바초프는 상술한 것처럼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는 수호하려고 노력했는데, 만약 고르바초프의 이런 시도가 성공했다면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독립은 영원히 불가능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랍니다
- 북한에서
당연히 평가가 좋을 리가 없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때문에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물론 소련까지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형제국들로부터의 원조가 끊겼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 고난의 행군이라는 궤멸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특히 냉전 시기 내내 북한이 공들여 온 중·소 사이에서의 줄타기 외교 전략이 완전히 무너져 버려 중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당장 북한의 "세계력사" 교과서만 봐도 북한은 고르바초프를 현대수정주의자, 사회주의배신자라는 표현을 동원하여 신랄하게 까고 있다. 대내적으로 다당제 도입, 시장경제 도입, 사상문화 분야에서의 자유화, 군대의 비정치화·비사상화를 추진하여 소련을 해체로 이끌었고, 이러한 정책이 대외적으로도 영향을 끼쳐 동유럽 공산 정권이 붕괴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답니다